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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onicle

1. 꽃다지가 태어나기까지(88년부터 92년까지)
87년 7,8,9월 전국을 뒤흔든 역사적인 노동자들의 함성으로 운동의 중심축이 학생과 지식인에서 노동자로 바뀌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학생과 지식인 중심의 노래운동은 노동자들이 중심에 서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역사의 주체로서 자신들을 인식하였고, 투쟁의 현장에서 함께 부를 자신들의 노래를 원했습니다.
노동자노래단(이하 노노단)과 삶의 노래 예울림(이하 예울림)이라는 두 단체가 기존의 노래운동의 소시민성을 극복하고 노동자들의 시각에서 노래를 창작하고 보급하기 위해 창립되었습니다. 그 때는 노노단과 예울림 외에도 전국적으로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노래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던 때입니다. 또한 노동자 노래패들도 구로, 인천, 울산, 거제 등에서 활발하게 조직되었던 때이기도 합니다.

노노단은 구로지역을 거점으로 김호철과 김애영 그리고 사고로 돌아가신 천미예 씨 등을 중심으로 하여, 88넌 하반기에 1집인 [총파업가]를 제작하면서 창작단의 성격으로 출발하였습니다. 그리고 김호철 씨는 구로지역의 슈어프로덕츠, 갑일전자, 나우정밀, 중원전자, 대한광학, KDK 등의 노동조합 노래패를 결성하여 파업과 집회에서 문선활동을 하면서 연대사업으로 구로노래패연합을 조직하였습니다. 그리고 89년 상반기에 2집 [전노협진군가]를 민족음악연구회의와 예울림의 가수들과 함께 제작을 하게 됩니다. 그 당시까지는 구로지역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하면서 대공장으로 확산되어 나가던 시기였기 때문에 노래들도 전자, 정밀 사업장의 젊은 여성노동자들의 정서를 담은 것들이 많았습니다.

창작단의 성격으로 출발한 노노단은 그때만 해도 매일 음반을 수백개씩 수공업적으로 복사하여 배포해야 할만큼 노래에 대한 요구가 많아지자 89년 하반기에 3집인 [노동자 행진곡]을 제작, 발매하면서 김애영, 김호철을 중심으로 류금신, 김성민, 이정열, 신양묘 등과 함께 연행, 창작 단체로 새롭게 구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4집 [민중연대 전선으로]에서는 윤민석도 함께 결합하였습니다.

반면 예울림은 대학노래패 출신인 안종호, 조민하, 유인혁, 이은진 등이 모여 그 당시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노래활동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논의하면서 준비하였습니다. 89년 3월 최루탄 부상자협의회 주최의 "4,5,6그리고 7,8"이라는 공연을 하면서 정식 연행단체로 발족했습니다. 그 성과를 바탕으로 예울림 1집인 [지리산, 너 지리산이여]를 발매하고, 그해 6월, 6.10항쟁기념공연인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연대백주년 기념관에서 올린 후 공연실황음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발매했습니다. 예울림은 그때까지 창작곡보다는 노동자들에게 검증된 노래들을 선곡하여 공연으로 올리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90년대초 2집인 [출정전야]를 조민하, 유인혁의 창작곡을 중심으로 제작하면서 박란희, 김세라, 서기상 등과 함께 연행 창작단위로써의 성격을 갖는 단체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두 단체는 각기 노동현장에 파업지원과 집회 등에 초청되어 노래뿐만 아니라 공동체놀이, 노래율동 함께 하기 등 노동자들의 현실적 요구를 바탕으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그 당시에는 한달에 서른번도 넘는 공연을 해야 할만큼 현장의 활동이 왕성했고 그만큼 노동가요에 대한 요구도 높았습니다. 서울지역노동문화단체협의회(이하 서노문협)에 가입을 하면서 89년 10월 "전노협 건설을 위한 노래판굿 꽃다지"의 음악을 맡아 공동 실천과 교류를 하기 시작하였고, 91년 열사 정국 때에도 거리에서 매일 함께 노래하고 울고 웃고 하였습니다.

90년 1월 22일 전국 노동운동의 구심체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하 전노협)이 결성되던 그 역사적인 날, 노동자들의 전국조직 결성에 겁을 먹은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야합이 이루어지고 총자본의 물리적 탄압은 그 이전보다 훨씬 더 거세졌습니다. 91년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에 대한 전쟁을 방불케하는 육·해·공군 상륙작전으로 인해 골리앗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게 되고, 그 이후 대중운동은 상대적으로 약간 침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연 창작곡들도 자신을 돌아보거나 지친 동지들에게 힘을 북돋아주기 위한 노래들이 많았습니다. <민들레처럼>,<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희망의 노래><골리앗의 그림자> 등이 그때 나온 노래들입니다.

자연 집회와 파업도 그 이전보다 줄어들자 집회공간이 아닌 생활공간에서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90년도에 들어서면서 대공장 노동조합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노래의 정서도 선이 굵은 중년 남성의 정서들로 점차 바뀌어 가고 있었습니다.
노노단과 예울림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범주가 확장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일상공간에서도 함께 부를 수 있는 다양한 노래로, 또한 노동자적 대중성과 전문성이 놓은 음악으로 다가가기 위해 통합을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통합을 먼저하고 여러 가지 서로 다른 부분들을 맞추어 갈 것인가 아니면 공동실천을 통해 서로 다른 부분들을 보완하면서 통합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91년 12월 노노단, 예울림 합동공연 "평등한 세상, 평화로운 땅, 아름다운 노래(약칭 평평아)" 공연을 중대 대학극장에서 올리게 됩니다. 이 때 <단결투쟁가>의 대합창 편성이 신양묘의 편곡으로 발표됩니다. 노노단과 예울림의 가수를 모두 합해 15명이나 되었고 반주반도 7명으로 총 22명이 무대에 선 공연이었습니다.

이 당시의 가수들이 김애영, 박영기, 김성민, 김태언, 장희경, 장은경, 엄명석, 심희수, 정미숙(이상 노노단) 서기상, 김세라, 박상희, 김현덕, 이경민, 김희정(이상 예울림) 등이고 반주반으로 드럼에 백연구, 베이스에 박필우, 기타에 유인혁, 건반에 신양묘, 정혜원, 전향미, 김명숙이 함께 무대에 섰습니다. 이외에도 연출과 작곡을 담당한 조민하, 대중문예사업을 담당하는 최준, 박미영, 기획을 담당했던 이은진, 김경진, 최민기 등이 꽃다지를 창립한 구성원들입니다.
2. 꽃다지를 창립하다!(꽃다지 원년 1992년)
"평평아" 공연에 관객은 많지 않았지만 대다수의 대중들로부터 작품성을 높이 평가받았으며 회원들의 음악적인 성취도 역시 높았던지라 그에 힘입어 신속하게 통합을 준비하였습니다. 우선 각각의 구성원들에 대한 역할분담, 자산평가, 회칙, 규약작업 등등을 진행하면서 가장 치열(?)하게 논의를 한 것이 바로 명칭입니다.
좋은 이름을 짓기 위해 백기완 선생님도 찾아 뵙고 사전들도 뒤져가며 2차, 3차를 거쳐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이름 두 개는 '꽃다지'와 '산맥' 입니다. 산맥은 연극단체 같기도 하고 특별히 정체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단점이고, 꽃다지는 앞서 말한 공연의 제목이기도 해서 사람들이 혼돈스러워 할 것이라는 점이 단점이었습니다.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꽃다지'로 결정이 나고, 대중들에게 좀더 명확하게 우리를 알린다는 의미로 '희망의 노래'를 앞에 붙이기로 했습니다. 이름하여 희망의 노래 꽃다지.

1992년 2월 29일, - 3월 1일을 창립일로 하여 해마다 뜻깊은 행사를 하기로는 하였으나 그날이 휴일이기 때문에 기자회견 등 성대하게 준비한 창립행사가 혹 피해를 입을까하는 우려에 하필이면 윤달인 점을 고려해 2월 29일을 행사날로 택했습니다. 종로구 낙원동에 위치한 민족예술인총연합 5층 대강당에서 서노문협 산하 단체 회원들과 선·후배님들, 기자들이 함께 한 자리에서 만천하에 꽃다지 창립을 선언하게 된 것입니다.

창립당시 총 회원은 33명. 김애영 선배를 초대대표로 모시고, 운영위원회체계로 조직운영을 하고, 회원을 활동수준과 역할에 따라, 정회원, 단원, 지도위원 등으로 구분을 하였습니다. 부서로는 창작과 공연을 담당하는 연행창작부, 그 산하에 가창반, 연주반, 창작반이 있었고, 교육부와 대중문예사업부, 그리고 기획부를 두어 업무를 체계적으로 분담하였습니다.
사무실은 성산동에 내고, 그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방음시설을 했습니다. 그런데 공사를 담당한 김모씨가 인원 비례로 연주실을 가창실의 절반도 안되게 분할하는 바람에 이후 상당히 지장이 많았습니다. 성산동은 세가 싼편도 아니고 교통도 불편한데 굳이 성산동으로 정한 이유는 단지 성산동에 살고 계시던 유일한 아기엄마인 김애영 선배를 대표로 반드시 추대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33명의 간곡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92년 여름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대표직을 내놓으시고야 말았습니다.

통합, 창립 후 왕성한 창작력을 발휘해 92년 8월초 <민들레처럼><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고귀한 생명의 손기로><동지들 앞에 나의 삶은> 등이 수록된 1집 음반(비합법)을 제작하고, 9월 음반 발매 기념공연을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좌표 1992"라는 제목으로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 공연에는 특별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의 주연을 맡았던 박혜숙 씨와 현 민예총 기획실장인 박인배 님이 출연하셨습니다.
이 공연의 형식은 영상과 춤과 연극이 결합된 집체극 형식의 공연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우려했던 일이 발생했습니다. 대중들이 연대강당에서 꽃다지가 공연을 한다니까 모두 '노래판굿 꽃다지'인줄 안겁니다. 여기에는 판굿 꽃다지 정도의 규모로 홍보한 영향도 컸습니다. 3회의 공연에 너무나 많은 대중들이 오시는 바람에 연장공연을 해야 했고, 일요일 낮공연에 입장하지 못한 대중들은 대강당 앞에서 그들끼리 노래하고, 율동하고, 공동체 놀이도 자체로 진행하면서 기다리는 인내를 보였습니다. 1만이 넘는 관객을 한 단체 공연에 동원하게 된 역사를 남긴 사건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꽃다지는 모두의 꿈이었던 12인승 승합차를 할부로 장만할 수 있었습니다.
3. 시련의 고개 넘어(92년 대선부터 93년까지)
92년 겨울,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이때 꽃다지는 남들 못지 않게 가슴 아픈 일이 많았습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순 없겠지만 곁에 있던 많은 동지들을 떠나 보내야 했고, 대선 후의 패배감과 조직의 분열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긴 겨울을 무기력하게 지내고나서 93년초 다시 총회를 통해 조직 정비를 해야 했습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수많은 사람들이 배신의 줄서기를 하는 것을 보면서 꽃다지의 어깨는 더욱 무거웠습니다. 총대를 메고 나선 사람은 유인혁 씨. 유인혁 씨를 대표로 하여 인원 정비를 하고, 남은 사람들을 추스리고 동지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에 대한 반성, 그리고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면서, 그런 심정을 노래로 만들어 비합법 2집을 준비했습니다. <전화카드 한 장><바위처럼><창살 아래 사랑아><통일이 그리워><꽃다지3> 등이 수록된 이 음반은 조성우, 홍미의 나미아 등이 새로 입단하면서 함께 작업한 음반입니다. 93년 9월에 음반발매기념공연 "동지"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때까지도 공연의 형식은 대형무대에서의 집체극 형식이었습니다.
4. 새로운 조직으로 거듭나 노동가요의 지평을 넓히며(93년 가을부터 94년 봄까지)
93년 가을은 꽃다지에게 무척 중요한 시점이었습니다. 93년초 노동자문화운동을 선도적으로 이끌어 오던 연합체, 협의체 조직들이 발전적으로 해소하면서 예술운동의 중심축을 장르 단체들로 옮겨 놓았습니다. 또 각 단체의 예술적 성과로 대중성과 전문성을 심화 발전시킨다는 기조 하에 민족예술인총연합은 사단법인화를 추진하기 시작했고, 연행예술단체들도 상대적으로 열어준 대중적 공간을 전술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모색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꽃다지 역시 기획실을 강화하고 전문적인 관리를 위해 매니저라는 개념을 부분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조민하 씨를 대표로, 이은진 씨를 기획실장으로 하여 92년의 상처로 약간 뒤로 물러나 있던 회원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음악단체로서의 자기 위상을 정립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조합조직이나 집회에서만 노동가요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공간에서 노동가요를 수용하는 사라들을 만나기 위해 '꽃다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제안하고 함께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꽃사람은 94년 5월 1일을 창립일로 하고, 월간 꽃사람 창간호를 발간합니다. 그리고 93년 12월말에 대학로에 있는 소극장 '한마당'에서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라는 제목으로 6일간 콘서트를 하였습니다. 편지와 시 낭송, 그리고 이야기가 있는 콘서트 양식을 조민하 씨의 섬세한 연출로 만들어 냈습니다. 그 후로 꽃다지는 콘서트에서 이 형식을 계속 고수했습니다.

음악적으로 깊어지고 넓어진 성과를 바탕으로 노동가요로는 최초의 합법음반 제작을 시도하였습니다. 이것은 노동가요가 더 이상 집회에서만 불려지는 노래가 아닌 삶의 현장 곳곳에서 밀접하게 함께 하는 것임을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알리고, 타 계층을 이미 검증된 건강한 노동가요의 정서로 견인하며, 공식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시도된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대규모 설문조사를 통해 노동가요에서 명곡이라고 꼽힐 만한 노래들을 엄선하였습니다.
대중성을 염두에 두고 욕심을 많이 내다보니, 편곡과 연주에서 그동안 꽃다지에서 함께 음악을 해온 연주단이 아닌 조동익 사단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단지 세련됨만이 아닌 새로운 음악적 느낌을 더 살리고, 보다 전문적인 영역을 개척하고자 하는 측면에서는 썩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한국음반'이라는 딱지를 달고 발매된 이 음반은 심의에서부터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설문을 통해 15곡 가량을 심의에 넣었는데, 공윤은 <고귀한 생명의 손길로>를 제외하고는 거의 가사 모두 가사 내용을 문제삼아 반려처리를 해버렸습니다. <단결투쟁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노래를 만들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이미 수백만이 알고 부르는 노래의 가사를 바꾸라니요? 문민정부에서 문화정책으로 발표한 몇가지 문안들을 첨부하고 평론가들의 의견과 함께 재심의를 넣었으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정 그렇다면 <단결투쟁가>만 빼달라는 요청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설문조사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알고, 가장 많이 부른 노래가 바로 이 노래인데… 꽃다지는 이 사실을 언론에 널리 알리고, 불법으로 음반을 제작하고 공윤철폐 투쟁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는 정태춘 선배가 심의를 받지 않고 음반을 제작하여 문민정부로부터 고발을 당하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헌법재판소에 사전심의에 대한 위헌신청을 해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꽃다지는 그동안 계속 심의를 받지않고 음반을 냈었기 때문에 그런 방식은 꽃다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오히려 공윤에서 심의를 내지 못할 듯한 노동가요들을 심의에 통과시킴으로써 심의규정자체의 문제점을 부각시키려 했었습니다.

이런 과정 중에 사단법인화된 민예총의 세종문화회관 입성투쟁의 성공과 세종문화회관에서의 공연 등이 같이 이루어지면서 공윤은 끝내 모든 노래를 한글자의 수정도 없이 모두 통과시켰고, 94년 5월 31일 시청앞 마당세실극장에서 합법음반 발매기념콘서트 "민들레처럼'을 올리면서 문화관련 제도개선투쟁은 1단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5. 창작의 어려움에 봉착하다.(94년 가을에서 95년까지)
94년초의 성공적인 투쟁과 이후의 전망에도 불구하고 꽃다지 성원들은 생활고에 무척 찌들어 있었습니다. 25명 정도의 인원이 공연만으로 먹고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처음 성산동에 자리를 틀면서 들인 거금과 음반과 콘서트를 하느라 제대로 초청공연도 못다니면서 지닌 엄청난 부채들로 인해 음악만으로는 살 수 없는 처지에 놓인 회원들이 속출하게 되었고, 또 창작의 문제에 있어서도 난관에 봉착을 하게 되었습니다.
꽃다지의 선배격인 김태언, 장희경, 박상희, 김세라, 이경민 등이 활동을 그만두고 조민하 선배도 대표직을 내놓으면서 또 한차례의 조직 개편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새 대표인 이은진씨와 기획실이 집단매니저의 역할을 하고 가창팀과 연주팀, 두팀으로 연행단을 구성하는 비교적 간편한 체계로 전환하면서 새로이 인원보강을 하였습니다.

94년 10월, 세종문화회관에서 노래판굿 꽃다지 공연과 95년 3월 연대노천극장의 노래판굿 꽃다지 재공연, 그리고 95년 4월 말 노동가요 공식음반 발매와 민주노총 출범을 기념하는 꽃다지 콘서트 "한 걸음씩"을 하면서 박향미, 윤미진, 김미정, 정승혜, 김일태, 이지은, 조민제, 박해선, 그리고 군에서 제대한 박필우가 결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95년 유인혁 씨마저 꽃다지를 정리하고 난 후 꽃다지는 창작의 문제가 엄청나 질곡으로 다가왔습니다. 선배들이 만들어 준 노래를 부르다가 선배들이 모두 정리를 하고 나니까 스스로 창작을 책임져야 하는 부담이 커진 것입니다. 또한 가수로서 연주자로서만이 아니라 창작인으로서의 자신을 만들려는 성원들의 예술적 욕구증대도 한 몫을 했습니다. 그간의 꽃다지 음악을 정리하고 또 재평가하고 새로운 음악장르에 대한 연구도 하고, 또 공부도 하면서 공동작업을 1년간 진행하고 그 성과로 95년 12월 신촌 창무포스트 극장에서 17일간의 장기(노래공연으로는 무척 장기공연인 셈입니다.)공연을 올렸습니다. 조민하 씨가 재결합을 하면서 연출을 맡았고, 1년간의 호흡을 바탕으로 한 공연이라 구성도 치밀하고 진행하는 사람들도 공연에 몰입해서 무척 재미있는 공연이었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6. 누가 뭐래도∼(96년)
꽃다지는 이러한 음악적 지향과 생산력의 문제, 재생산구조의 문제, 교육 체계의 문제 등에 대한 논의 끝에 96년부터는 솔로가수도 배출하고 총괄 관리하는 구조로써의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96년 사업의 세부계획이 수립되기도 전에 대표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민중가요 노래책에 북한을 찬양하는 노래를 수록했다는 이유로 책을 출판한 출판사 사장과 꽃다지 대표를 구속한 것입니다.

꽃다지는 마치 80년대로 돌아간 듯 탑골 공원 앞에서 50일간 "국가보안법 철폐! 구속문화예술인 석방! 완전한 예술창작표현의 자유 쟁취!" 라는 구호를 내걸고 차가운 거리에서 선전공연을 했고, 밤에는 민예총 사무실에서 농성을 했습니다. 그 당시 들어온지 세달 밖에 안 된 김용진과 안정현 까지 용기를 내어 씩씩하게 진행한 힘겹고도 눈물겨운 성원들의 투쟁의 결과로 대표는 50일만에 보석으로 석방되었고, 그간의 거리공연을 정리하는 콘서트를 96년 4월, 마당세실극장에서 발디딜 틈도 없이 들어찬 관객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 덕분에 일본 콘서트도 하는 등 오히려 그 이전보다 더 유명해졌습니다.
대중들의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꽃다지에 대한 기대치는 더 커졌고, 95년 겨울과 96년 봄 공연, 그리고 두 차례의 일본 공연 등을 치르면서 꽃다지는 음악 창작에 더욱 집중할 필요를 느꼈고, 그러기 위한 조건을 형성하는 것도 무척 중요함을 인식하여 현재의 영등포 사무실로 무리를 해서 이전을 하고 작업 공간을 꾸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서기상도 본격적인 솔로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7. 우리는 지금보다 강하게(1997년~2011년)
97년의 노동법 개정을 위한 총파업을 발로 뛰어다니며 시작하였습니다. 3년만에 2집 음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발매하고, 음반발매기념 콘서트를 하였습니다. 노동가요계 최초의 싱글음반 "세상을 바꾸자"를 제작하고 또 대선투쟁에 결합하였니다.
총파업과 대선을 치르며 정신없이 바쁘게 97년을 보내고 98년을 맞이하면서 또 한 번의 지리한 조직 개편 논의는 시작되었고, 98년 11월에 새로운 체계로 정리하였습니다. 가창팀, 연주팀, 기획실로 구성되었던 팀체계와 대표제와 직급제를 폐지하고 업무담당체계로 바꾸고 9명이라는 단촐한 식구가 남았습니다.
98년 체계정리로 남은 9명의 식구들이 1년간의 준비끝에 99년 가을에 합법3집음반 진주를 발매하였습니다. 이후 꽃다지 역사상 가장 단촐한 식구들이 남았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더욱 단단한 결속력으로 지속적인 음악작업을 한 결과, 2000년 가을에 두번째 싱글인 통일테마음반 오라를, 2001년 봄에는 세번째 싱글음반 반격을 발표하였습니다.

2001년 <반격> 음반 이후에는 <노래의 꿈>, <이 얼음같은 세상을 깨고>, <그래 사랑은>, <돈세상>등을 온라인을 통한 싱글음원으로 지속적으로 발표합니다.
활동영역 면에서도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 감소추세인 집회공연 외에 기획 공연을 통해 다양한 대중을 만나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대와의 진지하고 유쾌한 만남인 학교순회 콘서트 <꽃들에게 희망을>, 영세사업장 노동자들과 점심시간에 진행한 게릴라 콘서트 <공장순회콘서트>, 이주노동자들의 노동3권을 널리 알리며 문화를 나누는 이주노동자와 함께 하는 순회 콘서트 <손을 잡아야 해> 등을 활발히 펼치며 음악적 깊이와 넓이를 더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공연형식에 있어서도 변화가 이루어지며 MR위주의 공연을 지양하고 가수들이 직접 연주하고 노래하는 자리를 점점 늘리고 있습니다.
또한 기획, 초청 공연 외에 정기 콘서트를 지속적으로 가지며 활발히 새로운 노래들을 창작 발표하고 있습니다.

2011년 10년만에 정규 4집음반 “노래의 꿈”을 발표하여 대중과 음악평단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지금 꽃다지는 창작 및 노래를 책임지는 두 명과 기획하는 한 명이 새로운 꽃다지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우여곡절도 참 많았고, 앞서 밝힌 것처럼 1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꽃다지를 거쳐갔습니다. 참 마음 아픈 일도 많았지만 반면에 가슴 벅찬 일들도 또한 많았습니다. 누가 뭐라고해도 꽃다지는 꽃다지입니다. 그리고 현재 꽃다지를 지키고 또 앞으로 지켜나갈 사람들이 진짜 꽃다지입니다. 꽃다지 성원들뿐만 아니라 꽃다지의 씨를 뿌리고 있는 바로 여러분 모두가 꽃다지인 것입니다. 꽃사람이, 그리고 꽃다지를 아끼는 대중이 없으면 꽃다지는 꽃다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87년 7,8,9월 전국을 뒤흔든 역사적인 노동자들의 함성으로 운동의 중심축이 학생과 지식인에서 노동자로 바뀌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학생과 지식인 중심의 노래운동은 노동자들이 중심에 서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역사의 주체로서 자신들을 인식하였고, 투쟁의 현장에서 함께 부를 자신들의 노래를 원했습니다. 노동자노래단(이하 노노단)과 삶의 노래 예울림(이하 예울림)이라는 두 단체가 기존의 노래운동의 소시민성을 극복하고 노동자들의 시각에서 노래를 창작하고 보급하기 위해 창립되었습니다. 그 때는 노노단과 예울림 외에도 전국적으로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노래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던 때입니다. 또한 노동자 노래패들도 구로, 인천, 울산, 거제 등에서 활발하게 조직되었던 때이기도 합니다.

노노단은 구로지역을 거점으로 김호철과 김애영 그리고 사고로 돌아가신 천미예 씨 등을 중심으로 하여, 88넌 하반기에 1집인 [총파업가]를 제작하면서 창작단의 성격으로 출발하였습니다. 그리고 김호철 씨는 구로지역의 슈어프로덕츠, 갑일전자, 나우정밀, 중원전자, 대한광학, KDK 등의 노동조합 노래패를 결성하여 파업과 집회에서 문선활동을 하면서 연대사업으로 구로노래패연합을 조직하였습니다. 그리고 89년 상반기에 2집 [전노협진군가]를 민족음악연구회의와 예울림의 가수들과 함께 제작을 하게 됩니다. 그 당시까지는 구로지역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하면서 대공장으로 확산되어 나가던 시기였기 때문에 노래들도 전자, 정밀 사업장의 젊은 여성노동자들의 정서를 담은 것들이 많았습니다.

창작단의 성격으로 출발한 노노단은 그때만 해도 매일 음반을 수백개씩 수공업적으로 복사하여 배포해야 할만큼 노래에 대한 요구가 많아지자 89년 하반기에 3집인 [노동자 행진곡]을 제작, 발매하면서 김애영, 김호철을 중심으로 류금신, 김성민, 이정열, 신양묘 등과 함께 연행, 창작 단체로 새롭게 구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4집 [민중연대 전선으로]에서는 윤민석도 함께 결합하였습니다.

반면 예울림은 대학노래패 출신인 안종호, 조민하, 유인혁, 이은진 등이 모여 그 당시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노래활동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논의하면서 준비하였습니다. 89년 3월 최루탄 부상자협의회 주최의 "4,5,6그리고 7,8"이라는 공연을 하면서 정식 연행단체로 발족했습니다. 그 성과를 바탕으로 예울림 1집인 [지리산, 너 지리산이여]를 발매하고, 그해 6월, 6.10항쟁기념공연인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연대백주년 기념관에서 올린 후 공연실황음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발매했습니다. 예울림은 그때까지 창작곡보다는 노동자들에게 검증된 노래들을 선곡하여 공연으로 올리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90년대초 2집인 [출정전야]를 조민하, 유인혁의 창작곡을 중심으로 제작하면서 박란희, 김세라, 서기상 등과 함께 연행 창작단위로써의 성격을 갖는 단체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두 단체는 각기 노동현장에 파업지원과 집회 등에 초청되어 노래뿐만 아니라 공동체놀이, 노래율동 함께 하기 등 노동자들의 현실적 요구를 바탕으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그 당시에는 한달에 서른번도 넘는 공연을 해야 할만큼 현장의 활동이 왕성했고 그만큼 노동가요에 대한 요구도 높았습니다. 서울지역노동문화단체협의회(이하 서노문협)에 가입을 하면서 89년 10월 "전노협 건설을 위한 노래판굿 꽃다지"의 음악을 맡아 공동 실천과 교류를 하기 시작하였고, 91년 열사 정국 때에도 거리에서 매일 함께 노래하고 울고 웃고 하였습니다.

90년 1월 22일 전국 노동운동의 구심체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하 전노협)이 결성되던 그 역사적인 날, 노동자들의 전국조직 결성에 겁을 먹은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야합이 이루어지고 총자본의 물리적 탄압은 그 이전보다 훨씬 더 거세졌습니다. 91년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에 대한 전쟁을 방불케하는 육·해·공군 상륙작전으로 인해 골리앗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게 되고, 그 이후 대중운동은 상대적으로 약간 침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연 창작곡들도 자신을 돌아보거나 지친 동지들에게 힘을 북돋아주기 위한 노래들이 많았습니다. <민들레처럼>,<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희망의 노래><골리앗의 그림자> 등이 그때 나온 노래들입니다.

자연 집회와 파업도 그 이전보다 줄어들자 집회공간이 아닌 생활공간에서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90년도에 들어서면서 대공장 노동조합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노래의 정서도 선이 굵은 중년 남성의 정서들로 점차 바뀌어 가고 있었습니다.
노노단과 예울림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범주가 확장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일상공간에서도 함께 부를 수 있는 다양한 노래로, 또한 노동자적 대중성과 전문성이 놓은 음악으로 다가가기 위해 통합을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통합을 먼저하고 여러 가지 서로 다른 부분들을 맞추어 갈 것인가 아니면 공동실천을 통해 서로 다른 부분들을 보완하면서 통합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91년 12월 노노단, 예울림 합동공연 "평등한 세상, 평화로운 땅, 아름다운 노래(약칭 평평아)" 공연을 중대 대학극장에서 올리게 됩니다. 이 때 <단결투쟁가>의 대합창 편성이 신양묘의 편곡으로 발표됩니다. 노노단과 예울림의 가수를 모두 합해 15명이나 되었고 반주반도 7명으로 총 22명이 무대에 선 공연이었습니다.

이 당시의 가수들이 김애영, 박영기, 김성민, 김태언, 장희경, 장은경, 엄명석, 심희수, 정미숙(이상 노노단) 서기상, 김세라, 박상희, 김현덕, 이경민, 김희정(이상 예울림) 등이고 반주반으로 드럼에 백연구, 베이스에 박필우, 기타에 유인혁, 건반에 신양묘, 정혜원, 전향미, 김명숙이 함께 무대에 섰습니다. 이외에도 연출과 작곡을 담당한 조민하, 대중문예사업을 담당하는 최준, 박미영, 기획을 담당했던 이은진, 김경진, 최민기 등이 꽃다지를 창립한 구성원들입니다.

"평평아" 공연에 관객은 많지 않았지만 대다수의 대중들로부터 작품성을 높이 평가받았으며 회원들의 음악적인 성취도 역시 높았던지라 그에 힘입어 신속하게 통합을 준비하였습니다. 우선 각각의 구성원들에 대한 역할분담, 자산평가, 회칙, 규약작업 등등을 진행하면서 가장 치열(?)하게 논의를 한 것이 바로 명칭입니다. 좋은 이름을 짓기 위해 백기완 선생님도 찾아 뵙고 사전들도 뒤져가며 2차, 3차를 거쳐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이름 두 개는 '꽃다지'와 '산맥' 입니다. 산맥은 연극단체 같기도 하고 특별히 정체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단점이고, 꽃다지는 앞서 말한 공연의 제목이기도 해서 사람들이 혼돈스러워 할 것이라는 점이 단점이었습니다.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꽃다지'로 결정이 나고, 대중들에게 좀더 명확하게 우리를 알린다는 의미로 '희망의 노래'를 앞에 붙이기로 했습니다. 이름하여 희망의 노래 꽃다지.

1992년 2월 29일, - 3월 1일을 창립일로 하여 해마다 뜻깊은 행사를 하기로는 하였으나 그날이 휴일이기 때문에 기자회견 등 성대하게 준비한 창립행사가 혹 피해를 입을까하는 우려에 하필이면 윤달인 점을 고려해 2월 29일을 행사날로 택했습니다. 종로구 낙원동에 위치한 민족예술인총연합 5층 대강당에서 서노문협 산하 단체 회원들과 선·후배님들, 기자들이 함께 한 자리에서 만천하에 꽃다지 창립을 선언하게 된 것입니다.

창립당시 총 회원은 33명. 김애영 선배를 초대대표로 모시고, 운영위원회체계로 조직운영을 하고, 회원을 활동수준과 역할에 따라, 정회원, 단원, 지도위원 등으로 구분을 하였습니다. 부서로는 창작과 공연을 담당하는 연행창작부, 그 산하에 가창반, 연주반, 창작반이 있었고, 교육부와 대중문예사업부, 그리고 기획부를 두어 업무를 체계적으로 분담하였습니다.
사무실은 성산동에 내고, 그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방음시설을 했습니다. 그런데 공사를 담당한 김모씨가 인원 비례로 연주실을 가창실의 절반도 안되게 분할하는 바람에 이후 상당히 지장이 많았습니다. 성산동은 세가 싼편도 아니고 교통도 불편한데 굳이 성산동으로 정한 이유는 단지 성산동에 살고 계시던 유일한 아기엄마인 김애영 선배를 대표로 반드시 추대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33명의 간곡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92년 여름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대표직을 내놓으시고야 말았습니다.

통합, 창립 후 왕성한 창작력을 발휘해 92년 8월초 <민들레처럼><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고귀한 생명의 손기로><동지들 앞에 나의 삶은> 등이 수록된 1집 음반(비합법)을 제작하고, 9월 음반 발매 기념공연을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좌표 1992"라는 제목으로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 공연에는 특별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의 주연을 맡았던 박혜숙 씨와 현 민예총 기획실장인 박인배 님이 출연하셨습니다.
이 공연의 형식은 영상과 춤과 연극이 결합된 집체극 형식의 공연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우려했던 일이 발생했습니다. 대중들이 연대강당에서 꽃다지가 공연을 한다니까 모두 '노래판굿 꽃다지'인줄 안겁니다. 여기에는 판굿 꽃다지 정도의 규모로 홍보한 영향도 컸습니다. 3회의 공연에 너무나 많은 대중들이 오시는 바람에 연장공연을 해야 했고, 일요일 낮공연에 입장하지 못한 대중들은 대강당 앞에서 그들끼리 노래하고, 율동하고, 공동체 놀이도 자체로 진행하면서 기다리는 인내를 보였습니다. 1만이 넘는 관객을 한 단체 공연에 동원하게 된 역사를 남긴 사건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꽃다지는 모두의 꿈이었던 12인승 승합차를 할부로 장만할 수 있었습니다.

92년 겨울,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이때 꽃다지는 남들 못지 않게 가슴 아픈 일이 많았습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순 없겠지만 곁에 있던 많은 동지들을 떠나 보내야 했고, 대선 후의 패배감과 조직의 분열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긴 겨울을 무기력하게 지내고나서 93년초 다시 총회를 통해 조직 정비를 해야 했습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수많은 사람들이 배신의 줄서기를 하는 것을 보면서 꽃다지의 어깨는 더욱 무거웠습니다. 총대를 메고 나선 사람은 유인혁 씨. 유인혁 씨를 대표로 하여 인원 정비를 하고, 남은 사람들을 추스리고 동지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에 대한 반성, 그리고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면서, 그런 심정을 노래로 만들어 비합법 2집을 준비했습니다. <전화카드 한 장><바위처럼><창살 아래 사랑아><통일이 그리워><꽃다지3> 등이 수록된 이 음반은 조성우, 홍미의 나미아 등이 새로 입단하면서 함께 작업한 음반입니다. 93년 9월에 음반발매기념공연 "동지"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때까지도 공연의 형식은 대형무대에서의 집체극 형식이었습니다.

93년 가을은 꽃다지에게 무척 중요한 시점이었습니다. 93년초 노동자문화운동을 선도적으로 이끌어 오던 연합체, 협의체 조직들이 발전적으로 해소하면서 예술운동의 중심축을 장르 단체들로 옮겨 놓았습니다. 또 각 단체의 예술적 성과로 대중성과 전문성을 심화 발전시킨다는 기조 하에 민족예술인총연합은 사단법인화를 추진하기 시작했고, 연행예술단체들도 상대적으로 열어준 대중적 공간을 전술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모색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꽃다지 역시 기획실을 강화하고 전문적인 관리를 위해 매니저라는 개념을 부분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조민하 씨를 대표로, 이은진 씨를 기획실장으로 하여 92년의 상처로 약간 뒤로 물러나 있던 회원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음악단체로서의 자기 위상을 정립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조합조직이나 집회에서만 노동가요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공간에서 노동가요를 수용하는 사라들을 만나기 위해 '꽃다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제안하고 함께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꽃사람은 94년 5월 1일을 창립일로 하고, 월간 꽃사람 창간호를 발간합니다. 그리고 93년 12월말에 대학로에 있는 소극장 '한마당'에서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라는 제목으로 6일간 콘서트를 하였습니다. 편지와 시 낭송, 그리고 이야기가 있는 콘서트 양식을 조민하 씨의 섬세한 연출로 만들어 냈습니다. 그 후로 꽃다지는 콘서트에서 이 형식을 계속 고수했습니다.

음악적으로 깊어지고 넓어진 성과를 바탕으로 노동가요로는 최초의 합법음반 제작을 시도하였습니다. 이것은 노동가요가 더 이상 집회에서만 불려지는 노래가 아닌 삶의 현장 곳곳에서 밀접하게 함께 하는 것임을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알리고, 타 계층을 이미 검증된 건강한 노동가요의 정서로 견인하며, 공식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시도된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대규모 설문조사를 통해 노동가요에서 명곡이라고 꼽힐 만한 노래들을 엄선하였습니다.
대중성을 염두에 두고 욕심을 많이 내다보니, 편곡과 연주에서 그동안 꽃다지에서 함께 음악을 해온 연주단이 아닌 조동익 사단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단지 세련됨만이 아닌 새로운 음악적 느낌을 더 살리고, 보다 전문적인 영역을 개척하고자 하는 측면에서는 썩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한국음반'이라는 딱지를 달고 발매된 이 음반은 심의에서부터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설문을 통해 15곡 가량을 심의에 넣었는데, 공윤은 <고귀한 생명의 손길로>를 제외하고는 거의 가사 모두 가사 내용을 문제삼아 반려처리를 해버렸습니다. <단결투쟁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노래를 만들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이미 수백만이 알고 부르는 노래의 가사를 바꾸라니요? 문민정부에서 문화정책으로 발표한 몇가지 문안들을 첨부하고 평론가들의 의견과 함께 재심의를 넣었으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정 그렇다면 <단결투쟁가>만 빼달라는 요청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설문조사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알고, 가장 많이 부른 노래가 바로 이 노래인데… 꽃다지는 이 사실을 언론에 널리 알리고, 불법으로 음반을 제작하고 공윤철폐 투쟁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는 정태춘 선배가 심의를 받지 않고 음반을 제작하여 문민정부로부터 고발을 당하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헌법재판소에 사전심의에 대한 위헌신청을 해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꽃다지는 그동안 계속 심의를 받지않고 음반을 냈었기 때문에 그런 방식은 꽃다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오히려 공윤에서 심의를 내지 못할 듯한 노동가요들을 심의에 통과시킴으로써 심의규정자체의 문제점을 부각시키려 했었습니다.

이런 과정 중에 사단법인화된 민예총의 세종문화회관 입성투쟁의 성공과 세종문화회관에서의 공연 등이 같이 이루어지면서 공윤은 끝내 모든 노래를 한글자의 수정도 없이 모두 통과시켰고, 94년 5월 31일 시청앞 마당세실극장에서 합법음반 발매기념콘서트 "민들레처럼'을 올리면서 문화관련 제도개선투쟁은 1단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94년초의 성공적인 투쟁과 이후의 전망에도 불구하고 꽃다지 성원들은 생활고에 무척 찌들어 있었습니다. 25명 정도의 인원이 공연만으로 먹고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처음 성산동에 자리를 틀면서 들인 거금과 음반과 콘서트를 하느라 제대로 초청공연도 못다니면서 지닌 엄청난 부채들로 인해 음악만으로는 살 수 없는 처지에 놓인 회원들이 속출하게 되었고, 또 창작의 문제에 있어서도 난관에 봉착을 하게 되었습니다. 꽃다지의 선배격인 김태언, 장희경, 박상희, 김세라, 이경민 등이 활동을 그만두고 조민하 선배도 대표직을 내놓으면서 또 한차례의 조직 개편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새 대표인 이은진씨와 기획실이 집단매니저의 역할을 하고 가창팀과 연주팀, 두팀으로 연행단을 구성하는 비교적 간편한 체계로 전환하면서 새로이 인원보강을 하였습니다.

94년 10월, 세종문화회관에서 노래판굿 꽃다지 공연과 95년 3월 연대노천극장의 노래판굿 꽃다지 재공연, 그리고 95년 4월 말 노동가요 공식음반 발매와 민주노총 출범을 기념하는 꽃다지 콘서트 "한 걸음씩"을 하면서 박향미, 윤미진, 김미정, 정승혜, 김일태, 이지은, 조민제, 박해선, 그리고 군에서 제대한 박필우가 결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95년 유인혁 씨마저 꽃다지를 정리하고 난 후 꽃다지는 창작의 문제가 엄청나 질곡으로 다가왔습니다. 선배들이 만들어 준 노래를 부르다가 선배들이 모두 정리를 하고 나니까 스스로 창작을 책임져야 하는 부담이 커진 것입니다. 또한 가수로서 연주자로서만이 아니라 창작인으로서의 자신을 만들려는 성원들의 예술적 욕구증대도 한 몫을 했습니다. 그간의 꽃다지 음악을 정리하고 또 재평가하고 새로운 음악장르에 대한 연구도 하고, 또 공부도 하면서 공동작업을 1년간 진행하고 그 성과로 95년 12월 신촌 창무포스트 극장에서 17일간의 장기(노래공연으로는 무척 장기공연인 셈입니다.)공연을 올렸습니다. 조민하 씨가 재결합을 하면서 연출을 맡았고, 1년간의 호흡을 바탕으로 한 공연이라 구성도 치밀하고 진행하는 사람들도 공연에 몰입해서 무척 재미있는 공연이었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꽃다지는 이러한 음악적 지향과 생산력의 문제, 재생산구조의 문제, 교육 체계의 문제 등에 대한 논의 끝에 96년부터는 솔로가수도 배출하고 총괄 관리하는 구조로써의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96년 사업의 세부계획이 수립되기도 전에 대표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민중가요 노래책에 북한을 찬양하는 노래를 수록했다는 이유로 책을 출판한 출판사 사장과 꽃다지 대표를 구속한 것입니다.
꽃다지는 마치 80년대로 돌아간 듯 탑골 공원 앞에서 50일간 "국가보안법 철폐! 구속문화예술인 석방! 완전한 예술창작표현의 자유 쟁취!" 라는 구호를 내걸고 차가운 거리에서 선전공연을 했고, 밤에는 민예총 사무실에서 농성을 했습니다. 그 당시 들어온지 세달 밖에 안 된 김용진과 안정현 까지 용기를 내어 씩씩하게 진행한 힘겹고도 눈물겨운 성원들의 투쟁의 결과로 대표는 50일만에 보석으로 석방되었고, 그간의 거리공연을 정리하는 콘서트를 96년 4월, 마당세실극장에서 발디딜 틈도 없이 들어찬 관객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 덕분에 일본 콘서트도 하는 등 오히려 그 이전보다 더 유명해졌습니다.
대중들의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꽃다지에 대한 기대치는 더 커졌고, 95년 겨울과 96년 봄 공연, 그리고 두 차례의 일본 공연 등을 치르면서 꽃다지는 음악 창작에 더욱 집중할 필요를 느꼈고, 그러기 위한 조건을 형성하는 것도 무척 중요함을 인식하여 현재의 영등포 사무실로 무리를 해서 이전을 하고 작업 공간을 꾸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서기상도 본격적인 솔로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97년의 노동법 개정을 위한 총파업을 발로 뛰어다니며 시작하였습니다. 3년만에 2집 음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발매하고, 음반발매기념 콘서트를 하였습니다. 노동가요계 최초의 싱글음반 "세상을 바꾸자"를 제작하고 또 대선투쟁에 결합하였니다.
총파업과 대선을 치르며 정신없이 바쁘게 97년을 보내고 98년을 맞이하면서 또 한 번의 지리한 조직 개편 논의는 시작되었고, 98년 11월에 새로운 체계로 정리하였습니다. 가창팀, 연주팀, 기획실로 구성되었던 팀체계와 대표제와 직급제를 폐지하고 업무담당체계로 바꾸고 9명이라는 단촐한 식구가 남았습니다. 98년 체계정리로 남은 9명의 식구들이 1년간의 준비끝에 99년 가을에 합법3집음반 진주를 발매하였습니다. 이후 꽃다지 역사상 가장 단촐한 식구들이 남았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더욱 단단한 결속력으로 지속적인 음악작업을 한 결과, 2000년 가을에 두번째 싱글인 통일테마음반 오라를, 2001년 봄에는 세번째 싱글음반 반격을 발표하였습니다.

2001년 <반격> 음반 이후에는 <노래의 꿈>, <이 얼음같은 세상을 깨고>, <그래 사랑은>, <돈세상>등을 온라인을 통한 싱글음원으로 지속적으로 발표합니다.
활동영역 면에서도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 감소추세인 집회공연 외에 기획 공연을 통해 다양한 대중을 만나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대와의 진지하고 유쾌한 만남인 학교순회 콘서트 <꽃들에게 희망을>, 영세사업장 노동자들과 점심시간에 진행한 게릴라 콘서트 <공장순회콘서트>, 이주노동자들의 노동3권을 널리 알리며 문화를 나누는 이주노동자와 함께 하는 순회 콘서트 <손을 잡아야 해> 등을 활발히 펼치며 음악적 깊이와 넓이를 더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공연형식에 있어서도 변화가 이루어지며 MR위주의 공연을 지양하고 가수들이 직접 연주하고 노래하는 자리를 점점 늘리고 있습니다.
또한 기획, 초청 공연 외에 정기 콘서트를 지속적으로 가지며 활발히 새로운 노래들을 창작 발표하고 있습니다.

2011년 10년만에 정규 4집음반 “노래의 꿈”을 발표하여 대중과 음악평단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지금 꽃다지는 창작 및 노래를 책임지는 두 명과 기획하는 한 명이 새로운 꽃다지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우여곡절도 참 많았고, 앞서 밝힌 것처럼 1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꽃다지를 거쳐갔습니다. 참 마음 아픈 일도 많았지만 반면에 가슴 벅찬 일들도 또한 많았습니다. 누가 뭐라고해도 꽃다지는 꽃다지입니다. 그리고 현재 꽃다지를 지키고 또 앞으로 지켜나갈 사람들이 진짜 꽃다지입니다. 꽃다지 성원들뿐만 아니라 꽃다지의 씨를 뿌리고 있는 바로 여러분 모두가 꽃다지인 것입니다. 꽃사람이, 그리고 꽃다지를 아끼는 대중이 없으면 꽃다지는 꽃다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History

2023

- 1월 11일 자동차판매연대지회 2023 신년 집중 문화제
- 3월 22일 투쟁 승리를 위한 아사히글라스 수요문화제 '꽃다지와 함께'
- 3월 25일 꽃다지 후원주점 개최(남영동 슘)
- 4월 5일 10.29 이태원 참사 159일 추모 릴레이 콘서트 '어두울수록 빛나는 진실의 별 159'
- 8월 26일 캠핑콘서트 '콘서트 사람'(여주 금은모래캠핑장)
- 세월호참사9주기 인천 추모문화제(인천시청 애뜰광장)
- 10.21 독도의 날 기념 꽃다지 콘서트(시흥시 동산길 야외무대)
- 10.20 MBC 뉴스 하이킥 뒷풀이쇼(MBC광장 상설무대)
- 11.18 우리동네 마실장 콘서트(문경 아자개장터)
- 12.06 꽃다지 인천 콘서트 '당부(부평아트센터 달누리극장)

2022

- 꽃다지 유튜브생방송 ‘으라차차’ 매월 1회 진행(유튜브 생중계)
- 9월 24일 유튜브생방송 ‘꽃다지, 서른 살’(전태일 기념관 울림터)
- 10월 29일 2022 청년, 노동자와 만나서 톡톡한다 '옥상 톡톡 콘서트'
- 10월 31일 세월호 추모 기억문화제 출연(서울시청 다목적홀)
- 11월 4일 인천노동문화제 출연(송도 트라이보울)
- 12월 3일 꽃다지 송년 콘서트 ‘노회찬 재단 후원회원과 함께하는 함께데이’(KT&G 상상마당 홍대 라이브홀)
- 12월 10일 세월호 가족, 시민 송년과 연대의 밤
- 12월 21일 세종호텔 정리해고철회! 투쟁승리 목요문화제

2021

- 7월 4일 온라인 콘서트 ‘착한 사람들에게’(유튜브 생중계)
- 10월 31일 세월호 추모 기억문화제 출연(서울시청 다목적홀)
- 11월 4일 인천노동문화제 출연(송도 트라이보울)
- 11월 27일 역사희망콘서트(고양아람누리 극장)

2020

- 7월 4일 온라인 콘서트 ‘착한 사람들에게’(유튜브 생중계)
- 10월 31일 세월호 추모 기억문화제 출연(서울시청 다목적홀)
- 11월 4일 인천노동문화제 출연(송도 트라이보울)
- 11월 27일 역사희망콘서트(고양아람누리 극장)

2019

- 꽃다지 콘서트 ‘데모가 희망이다’ 2회 (홍대 상상마당 라이브홀)
- 꽃다지 평화 콘서트(오산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2018

- 2월 23일 평창올림픽 기념 DMZ 아트페스타 출연(고성DMZ통일전망대)
- 3월 29일 전주 콘서트(움티학교 주최)
- 4월 28일 제주 4.3 항쟁 70주년 작가회의포럼 축하공연(제주 한화리조트)
- 9월 15일 제주와봔 콘서트(제주 와봔)

2017

- 4월 29일 촛불집회(광화문)
- 6월 9일 이한열열사 30주기 문화제 ‘2017이 1987에게’ 출연(서울광장)
- 6월 10일 경기민족예술제‘유월의 숨결, 광장의 꽃 되어’(수원 화성행궁 광장)
- 7월 8일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양심수 석방 문화제 출연(광화문 광장)
- 12월 찾아가는 콘서트(서울 공중캠프, 판교 커먼키친, 작은책 송년회 등)

2016

- 2월 25일 <섬과 섬을 잇다 2> 출간기념 북콘서트 연출(가톨릭회관 다리 CY씨어터)
- 11월 전국장애인차별철폐 문화제 출연(서울시청 다목적홀)
- 12월 31일 촛불문화제 ‘송박영신’(광화문광장)

2015

- 4월 23일 세계 책의 날 기념 시낭송 콘서트 ‘세상을 시로 위로하다’ 기획 연출 및 출연(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
- 5월 27일 꽃다지 깜짝 콘서트 ‘걱정말아요’(신촌 인디톡)
- 7월 3일 순천 콘서트 ‘응답하라 바위처럼’(순천시문화건강센터)
- 10월 4일 함께하는 콘서트 ‘구로이야기’ 연출 및 출연(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
- 9월 네이버 뮤직 온스테이지 출연

2014

- 현장 콘서트 ‘침묵은 똥이다’(6월 27일 대한문 앞, 9월 25일 부평역 쉼터공원, 10월 8일 안산 화랑유원지 합동분향소 뒷편)
- 6월 23일 <섬과 섬을 잇다> 출간기념 북콘서트 연출 및 출연(가톨릭회관 다리 CY씨어터)

2013

- 7월 5일, 6일 꽃다지 여름 콘서트(롤링홀 2회)
- 11월 3일 가나가와중고 ‘무지개페스타’(가나가와중고) / 11월 4일 유스페스타
- 11월 16일, 17일 메트로콘서트(세종문화회관)
- 5월~11월 이주민과 함께 하는 꽃다지 콘서트 ‘노래만큼 좋은세상’(5개 도시 순회)

2012

- 3월 EBS Space공감 출연(3월28일 방송)
- 3월 홍세화 & 꽃다지 빅쇼(종로 둘로스 소극장)
- 5월 꽃다지 콘서트 “혼자 울지 말고”(KT&G 상상마당)
- 6월~11월 이주민과 함께 하는 순회콘서트 ‘2012, 손을 잡아야 해’(전국 5개 도시 순회)
- 11월 인권콘서트(강릉 단오문화관)
- 11월 콘서트 동행(클럽 제스, 2회)
- 11.30 정윤경 콘서트(홍대 벨로주)

2011

- 이주민과 함께 하는 콘서트 “2011 손을 잡아야 해”(전국 18개 도시 순회)
- 7월 15, 16일 꽃다지 음반발매기념 콘서트 “노래의 꿈”(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 2회)
- 11월 1일 꽃다지 4집 <노래의 꿈> 발매

2010

- 5월 꽃다지 콘서트(5월, 카페 벨로쥬)
- 꽃다지 여름 콘서트(8월, KT&G 상상마당)
- 전태일 40주기 “전태일 축전” 총연출 및 출연(서울광장)

2009

- 이주노동자와 함께 하는 순회 콘서트 “2009 손을 잡아야 해(여주, 오산, 포천 등 10개 지역 순회공연)
- 성미산 마을극장 개관기념 콘서트(성미산 마을극장 ‘나루’)
- 부산콘서트 ‘착한 사람들에게(6월, 부산민주공원 중극장/400여명/부산민주공원 주최)
- 일본 평화 콘서트 “안녕하이사이와꾸와꾸”(동경 우에노 공원 내 수상음악당, 1,000여명)
- 일본 순회 공연(메이데이 집회, 평화헌법수호 등 초청 공연)

2008

- 한국과 오키나와를 잇는 예술인들의 평화 콘서트(오키나와 사꾸라자카극장)
- 꽃다지 여름 콘서트 “Over the Rainbow”(7월, 클럽 로이, 3회)
- 꽃다지 가을 콘서트 “나를 바다로”(10월, 클럽 프리버드, 3회)
- 꽃다지 겨울 콘서트 “브레멘 음악대”(12월, 클럽 프리버드, 5회)

2007

- 제20회 인천노동문화제 ‘밥과일20’출연
- 이주노동자와 함께 하는 음악회 ‘07 손을 잡아야 해’(오산 등 7개 지역 순회공연)
- 비정규직 노동자와 함께 하는 거리공연

2006

- 꽃다지 공장순회 콘서트 ‘밥이 되는 노래’
- 이주노동자와 함께 하는 음악회 ‘손을 잡아야 해’
- EBS Space공감 출연(2월25일 방송)
- 꽃다지 송년 콘서트(홍대 Club打)

2005

- 광명음악밸리 ‘민중가요의 날’ 출연
- 꽃다지 콘서트 ‘평온한 저녁을 위하여2’(롤링홀, 5회)
- 공장순회콘서트(전국 8개 사업장 순회)
- 학교순회콘서트 ‘우리는 청년이다’(광주 과학고 등 7개 학교 순회)
- 꽃다지 일본 콘서트 ‘통일아리랑’(1회)
- 꽃다지 일본 순회 공연(일본 노동자페스티벌 등 5곳 순회 공연)

2004

- 고등학교 순회 콘서트 ‘꽃들에게 희망을’(5개 고등학교 순회)
- 꽃다지 송년 작은 음악회(대학로 동숭무대)
- 공장순회 작은 음악회(7개 중소기업사업장 순회)
- 소외계층과 함께 하는 인천 거리공연

2003

- 시와 노래와 영상이 있는 콘서트 ‘꽃다지가 만난 사람들’(하자센터 999홀)
- 비정규직노동자와 함께 하는 거리공연(12회 진행)
- 여성노조 지원을 위한 ‘안치환, 꽃다지 조인트콘서트’(이대강당)
- 꽃다지 10주년 기념 자료구축 CD-ROM 및 10주년 기념콘서트 비디오 세트 발매
- 꽃다지 콘서트 『꽃은 피고…』(5월, 인사예술극장, 5회)
- 꽃다지 가을 콘서트(10월, 인사예술극장, 5회)
- 노동가수 연합 콘서트 <소주 한 잔>(대학로 라이브 극장, 꽃다지 주최)

2002

- 꽃다지 1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발족(추진위원장 김애영 꽃다지 초대대표)
- 노동문화마당 세상만사 노래마라톤 출연
- 꽃다지 10주년 기념 콘서트 <노동가요 15년, 꽃다지 10년>(연세대 대강당. 2회 공연)
- 꽃다지 송년 음악회 <꽃다지가 멍석 깔아 놓은 마을잔치>(한양대 소극장)

2001

- 꽃다지 콘서트 <반격>(기독교100주년 기념관)
- 싱글 3집 음반 <반격> 발매
- 월례문화마당 세상만사 7주간의 노래마라톤 <따로 또 같이> 출연
- 꽃다지 & 유정고밴드 조인트 콘서트(홍대 앞 창무극장)

2000

- 3집 발매 기념 꽃다지콘서트 『2000꽃다지』(연강홀 5회. 2000년 1월 28일(금) 오후 7시 30분 / 29일(토) 4시, 7시 /30일(일) 3시, 6시 )
- 일본 순회공연(동경 콘서트 2회, 재일 교포 통일마당3회)
- 꽃다지 콘서트 <깊어 가는 가을밤에>(마녀소극장)
- 두 번째 싱글 음반 “오라” 발매
- 전태일30주기 기념 <연극 전태일> 순회공연(서울, 대구, 부천, 대전, 창원, 울산)

1999

- 고용안정 쟁취를 위한 [`99노래판굿 꽃다지] 『40시간, 또 다른 세상으로』참여
- 노동가요 복각음반 “노동가요명곡선집” 발매
- 꽃다지 & 안치환 조인트콘서트 <동행>(연세대 노천극장)
- 꽃다지 3집 음반 “진주” 발매
- 꽃다지 송년 콘서트(인천 인하대대강당)

1998

- 꽃다지콘서트 <빈 의자>(동숭아트센터 동숭홀. 9회. 3월 10일-3월 15일)
- 실업위기 극복을 위한 거리공연 : 매주 수요일마다 진행(30여회)
- 실업극복문화한마당 참여(전국 10개 도시 순회, 40회)
- 꽃다지 송년 콘서트 <겨울 그리고 사랑노래>

1997

- 꽃다지 2집 음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발매(서일음향)
- 2집음반 발매기념 꽃다지콘서트 (마당세실극장)
- 5대 도시 순회 전국투어 콘서트(광주, 구로, 전주, 부산, 인천)
- 꽃다지콘서트 <↖>(대학로 라이브1관 극장)
- 민중가요 최초의 싱글 음반 “세상을 바꾸자” 출반

1996

- 꽃다지콘서트 <꽃다지 봄 콘서트>(마당세실극장)
- 지역 순회 콘서트(인천, 안산, 부산, 광주, 구로)
- 꽃다지콘서트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두레극장)
- 일본 백만 인의 신세타령&젠또이쯔 노조 초청 순회공연(고마진자/후끼후네/요코하마/도쿄)
- 꽃다지콘서트 <옴니버스콘서트 따로 또 같이>(마당세실극장)

1995

- 옴니버스 노동가요공식음반 녹음참여(화음레코드)
- 노동가요공식음반 발매 기념 꽃다지콘서트<한 걸음씩>(소극장 오늘)-5개도시 순회공연
- 꽃다지콘서트<`96 겨울 꽃다지 콘서트>(창무포스트극장)

1994

- 사단법인 민예총 주최 - ‘다시 서는 봄’ 출연(세종문화회관 대강당)
- 꽃다지 합법 1집 음반 ‘금지의 벽을 넘어 자유를 노래하리라’ 발매(한국음반)
- 꽃다지콘서트 <민들레처럼>(마당세실극장)

1993

- 93범민족대회- 꽃다지와 함께 하는 ‘통일 아리랑’(연세대 노천극장)
- 꽃다지콘서트 <동지>(세종대 대양홀)
- [노래판굿 꽃다지] 전국순회공연
- 꽃다지콘서트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예술극장 한마당)

1992

- 희망의 노래 꽃다지 창립(노동자노래단과 삶의 노래 예울림 통합)
- 꽃다지콘서트 <좌표 1992>(연세대 대강당)

1989

- 삶의 노래 예울림 창립
- 1집 <지리산, 너 지리산이여>, 2집 <출정전야>, 3집 <굳세어라 동지여>
- 조민하, 유인혁, 서기상, 윤미진, 박향미, 이은진, 박란희 등 활동

1988

- 노동자노래단 창립
- 1집 <총파업가>, 2집 <전노협진군가>, 3집 <노동자행진곡>, 4집 <민중연대 전선으로> 발표.
- 김애영, 김호철, 윤민석, 류금신, 김성민, 이정열, 천미애, 신양묘 등 활동

희망의 노래 | 꽃다지

‘희망의 노래 꽃다지’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노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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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cert
Album
Archiving
Supporter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동로 195 지층 010-4190-6600 (민정연) |
1992~2025 © 희망의 노래 | 꽃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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